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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 – 단순하지 않은 성장의 기록

by 나응순 2025. 4. 15.

돼지가 한마리도 죽지않던날 도입부 그림

 

책장을 넘기기 전에는 몰랐다. 이 조용한 제목 속에 이렇게 많은 삶의 양면과 감정의 소용돌이가 들어 있을 줄은.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은 내가 진심으로 아끼는 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장면도 헛되이 지나가지 않는다. 처음엔 웃게 만들고, 중간엔 말없이 무너뜨리며, 마지막엔 깊고 잔잔하게 남는다.

작가 소개 – 로버트 뉴턴 펙

로버트 뉴턴 펙(Robert Newton Peck, 1928–2020)은 미국의 작가로, 버몬트주 시골 마을의 셰이커 공동체에서 자랐다. 대공황 시기를 배경으로, 그는 도살장 노동자, 벌목꾼, 제지공장 일꾼 등 다양한 경험을 하며 살아왔고, 그 삶의 내력이 이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은 그의 자전적 성장소설로, 단 3주 만에 집필한 첫 작품이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 독자들의 마음을 울리는 고전으로 남아 있다.

줄거리 요약 – 소년과 돼지, 그리고 어른이 되어가는 이야기

주인공 로버트는 12살 소년이다. 가난한 시골 농장에서 자라며, 소박하고 단순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어느 날, 학교를 땡땡이치고 돌아오던 그는 이웃의 헛간에서 송아지가 태어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고, 도움을 주게 된다. 그 공로로 로버트는 새끼 돼지 '핑키'를 선물받는다.

핑키는 로버트의 친구이자 가족이 된다. 하지만 농장의 현실은 잔혹하다. 암컷인 핑키는 새끼를 낳지 못하고, 가족은 너무 가난하다. 결국 로버트는 도축이라는 선택을 마주하게 되고, 사랑하던 존재를 떠나보내는 슬픔과 어른이 되어가는 아픔을 동시에 겪는다.

이후, 로버트의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그날, 아무 돼지도 죽지 않는다.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돼지가 죽지 않았다. 이 마지막 문장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아이러니와 깊이를 압축한, 아주 조용하고도 울림이 큰 문장이다.

감정의 소용돌이 – 단순하지 않은 이야기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단순한 성장소설이겠지.”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이 이야기는 내가 읽어온 많은 책 중에서도 가장 감정적으로 뒤흔들어놓는 책이었다.

학교를 땡땡이치고 돌아오다 우연히 생명의 탄생을 마주한 그 장면— 그건 소년이 ‘자기 뜻과 상관없이 어른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로버트는 더 이상 그냥 아이가 아니었다. 삶과 죽음, 선택과 책임, 존재의 무게가 서서히 그의 어깨에 내려앉는다.

그 장면 –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가장 잊지 못하는 장면이 있다. 바로, 강아지와 새를 한 통에 넣어 “누가 이기든, 살아남는 자만이 가치가 있다”는 잔혹한 규칙 아래 싸움을 벌이게 만든 장면. 결국 피투성이로 상처를 입은 강아지가 통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것이 정적에 휩싸인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살아남은 것이 이긴 것이 아니라, 그저 세상에 하나 남은 상처일 뿐이었다. 누구든, 어떤 생명이든, 그렇게 사지로 몰릴 필요는 없다. 이건 생존이 아니라 폭력이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아무도 울지 않았다. 모두가 침묵한 그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외쳤다.

“그건 너무했다. 사람은 그렇게 누군가를 버려두면 안 되는 거야.”

삶과 죽음의 양면성 – 돼지가 죽지 않던 날

그리고 마지막.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돼지가 죽지 않았다.” 이 한 줄은 너무나 복잡한 감정을 안겨준다. 돼지가 살아남은 것은 다행일까? 아버지가 죽은 것은 너무 슬픈 일인데? 기뻐할 수 없는 기쁨, 슬퍼할 수 없는 평온— 삶과 죽음은 그렇게 얽혀 있었다.

이 작품은 선과 악, 기쁨과 슬픔, 생명과 죽음이 결코 선명하게 나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이 세계는 언제나 양면을 가지고 있고, 진짜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 양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힘을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건 누구의 이야기일까?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은 결국 누구의 이야기일까? 로버트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도 삶 속에서 수없이 많은 선택 앞에 선다. 사랑하는 존재를 떠나보내야 할 때,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삼켜야 할 때, 삶이 주는 기쁨이 동시에 슬픔일 때.

그럴 때 이 책은 조용히 옆에 앉아 속삭인다.

“괜찮아. 너도 그렇게 조금씩 어른이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