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은 언제부터 '혼자 있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을까요?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는 그런 질문에 아주 조용하고, 단단한 목소리로 답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한 사람이 떠오릅니다. 바로 버지니아 울프. 그녀가 말했던 "자기만의 방"은, 어쩌면 수전이 끝내 찾아갔던 ‘19호실’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 소개 –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
도리스 레싱은 1919년 이란에서 태어난 영국의 대표적인 여성 작가로, 200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풀잎은 노래한다』, 『금색 노트』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인간의 내면과 사회적 억압, 젠더 문제를 탁월하게 다룬 작가로 평가받습니다. 『19호실로 가다』는 그녀의 중단편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으로, 레싱 특유의 내밀한 시선이 고스란히 담긴 걸작입니다.
줄거리 요약 – 왜 그녀는 19호실로 갔을까
주인공 수전은 남편 매슈와 네 아이를 둔 전업주부입니다. 겉보기엔 부족함 없는 중산층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녀는 점점 **자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감각**에 휩싸입니다. 좋은 아내, 헌신적인 엄마라는 사회적 역할은 그녀를 완전히 둘러싸고, 수전은 점점 ‘나’로 존재하는 법을 잃어갑니다.
남편의 외도, 반복되는 일상,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 속에서 수전은 어느 날 문득 '혼자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호텔의 19호실을 빌려, 그곳에서 말없이 앉아, 말없이 존재합니다. 그 조용한 방 안에서만큼은 더 이상 누군가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아도 되는 자신을 마주합니다.
하지만 그 자유는 끝내 사회가 허락한 것이 아니었고, 그녀의 극단적인 선택은 오히려 지금 우리가 왜 여성에게 ‘방’이 필요한가를 되묻게 만듭니다.
자기만의 방 – 버지니아 울프와 도리스 레싱이 말하는 것
버지니아 울프는 이미 1929년, 『자기만의 방』을 통해 말했습니다.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선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이 상징적인 문장은 단지 작가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녀가 말한 ‘방’은 단지 공간이 아니라, 존재의 주체로 살기 위한 물리적, 심리적 독립</strong을 의미하죠.
그리고 도리스 레싱은 40년 뒤, 『19호실로 가다』에서 **그 방이 부재한 삶이 어떤 파국을 향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울프가 선언처럼 외쳤던 그 ‘방’이 사라졌을 때, 수전은 결국 **호텔의 낯선 방 하나를 찾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두 여성 작가는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지만, 그들이 말한 것은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여성에게도 자기만의 시간이,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내 감상 – 나도 그 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책을 덮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 방—19호실—나도 그곳에 앉아 있었던 것만 같았거든요.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 그 방. 그저 조용히 내 숨소리만 가득 찬 공간에서 **'나'로 존재하는 그 고요함**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면 ‘무슨 일이 있냐’고 묻습니다. ‘힘들면 말하라’고, ‘왜 가족과 함께하지 않냐’고, ‘그러는 건 이기적인 거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진짜로, 아무 일 없이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은 이상한 걸까요?
수전의 행동은 회피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선택</strong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스로의 존재로 돌아가기 위한, 조용한 탈출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수전이 너무도 이해가 됐습니다. 그 방에서 보내는 조용한 몇 시간이 얼마나 값지고 절박한 시간이었는지, 그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방은 지금도 존재해야 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을 꺼내기 어려워합니다. 그 마음은 오해받기 쉽고, 종종 죄책감으로 이어지죠. 하지만 울프와 레싱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그 방은 누구에게도 사과할 필요가 없는 당신의 권리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도, 아기를 돌보는 엄마에게도, 회사에서 치열하게 일하는 여성에게도 그 방은 필요합니다. 그저 숨을 고르고, ‘나’라는 이름을 되찾을 수 있는 고요한 공간. 그게 바로 자기만의 방이고, 우리의 19호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