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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응순의 생활정보

엘레나 페란테 『나폴리 4부작』 리뷰

by 나응순 2025. 4. 10.

성공한여자

 

나폴리 4부작: 여성의 우정이 시대와 세계를 품을 때

엘레나 페란테, 침묵 속에서 세상을 울리다

‘내 이야기를 당신에게 전부 맡깁니다. 나를 지워 주세요. 내 이름도, 흔적도,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나폴리 4부작』의 주인공 릴라가 친구 엘레나에게 당부한 말이다.
그리고 이 말을 따라, 작가 엘레나 페란테는 자신의 실명을 드러내지 않은 채, 20세기 중반부터 21세기 초까지 이탈리아 나폴리 빈민가에서 성장한 두 소녀의 삶을 장대한 서사로 남겼다.

『나의 눈부신 친구』부터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까지 이어지는 이 4부작은, 단순한 성장소설이 아니다. 이 책은 두 여성의 우정, 여성의 삶과 언어, 계급과 지식, 그리고 자기 존재를 향한 치열한 사유의 여정이다.


1. 『나의 눈부신 친구』 — 불완전한 사랑과 경외의 시작

모든 이야기는 두 소녀, 릴라와 레누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가난한 나폴리 빈민가에서 자란 그들은 세상의 폭력과 무지 앞에, 서로를 붙잡은 채 살아가기를 선택한다.

릴라는 거칠고, 아름답고, 본능적으로 똑똑하며, 레누는 조용하고 성실하며, 글쓰기를 통해 자기 세계를 만들려 한다. 둘은 서로를 경쟁자이자 거울, 우상이자 적으로 바라보며, 자신이 될 수 없는 존재를 동경하고 질투한다.

우정은 단순한 지지와 응원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사랑보다 더 질투심을 자극하고, 증오보다 더 끈질기며, 인생을 평생 흔들어 놓는 기억의 진원지가 된다.


2.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 삶의 선택과 세계의 균열

이제 두 사람은 소녀가 아닌 젊은 여성이 된다. 릴라는 결혼을 통해 물리적으로는 안정을 얻지만, 그 안에는 무너진 꿈과 부조리한 폭력의 일상이 기다리고 있다.

레누는 대학에 진학하고 나폴리 바깥의 세상을 경험하며, 자기 자신을 글쓰는 인간으로 정립하려 애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성공과 자율성조차 릴라라는 이름 앞에 무력해진다는 사실이다.

릴라는 계속해서 레누의 삶을 흔든다. 감정적으로 매혹적이며, 동시에 지적으로 자극적인 존재다. 릴라는 말하지 않아도 글이 되는 인물이며, 레누는 글을 써야만 살아 있는 인물이다.


3. 『떠난 자와 머문 자』 — 계급, 지식, 여성의 언어

이제 두 여성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산다. 레누는 저자로서 사회적으로 이름을 얻었고, 릴라는 육체노동에 시달리며, 자본주의적 착취 속에서 살아간다.

이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여성의 글쓰기와 계급, 정치의 문제로 확장된다. 릴라는 신체와 감각, 현실의 불합리 속에서 말로 설명되지 않는 세계를 살아낸다. 반면, 레누는 문장과 서사, 이론과 언어 속에서 ‘말해진 세계’만을 믿는다.

릴라의 침묵은 여전히 압도적이고, 레누의 문장은 때로는 공허하다. 두 여성 모두 스스로를 찾으려 하지만, 결국 릴라의 실종과 레누의 회고록이라는 구조는 ‘말해지지 않음’과 ‘글로 남기는 것’ 사이의 긴장으로 이 소설을 완성한다.


4.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 끝없는 상실, 그리고 문장으로서의 구원

마지막 권은 모성의 문제, 잃어버림, 실종과 존재의 지워짐이라는 비극적인 감정들로 가득하다. 릴라는 그녀의 딸을 잃고, 레누는 점점 더 릴라와의 기억 속에 자신을 매달리게 된다.

마침내 릴라는 스스로 흔적을 지우고, 모든 사진과 기록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남는 것은 릴라를 기억하고 싶지 않아 하는 레누, 그런 레누가 결국 또다시 릴라를 글로 남기려는 역설이다.

"나는 이제 글을 써야 한다. 릴라가 가장 원치 않았던 방식으로 그녀를 다시 살려내야 한다."

이 마지막 문장은, 『변신』이나 『1984』 같은 비극의 끝에 남는 질문과 닿아 있다. 기억은 우리를 구원하는가? 아니면, 더욱 고통스럽게 되살리는가?


독자 감상 — 나의 과거, 나의 릴라

이 책을 읽으면서, 같은 여자로서 더욱 공감이 깊었다. 릴라와 레누의 관계는 단순한 우정 이상의 것이었다. 그건 끊임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비교하고, 질투하고, 또 그 안에서 자기를 발견해가는 복잡하고도 뿌리 깊은 감정이었다.

그 감정은 내 어린 시절과 겹쳤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 몹시 가난했다. 그때 내 옆자리에 앉았던 부잣집 친구는 늘 하얗고 긴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쳤다. 그녀의 집에서는 늘 좋은 냄새가 났고, 나는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며 속으로 부러워하곤 했다.

그 이후로도 우연히 인연이 닿아, 우리는 지금도 연락하고 지낸다. 그녀는 이제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지만, 나는 여전히 그 시절의 감정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나 혼자만 그녀를 의식하고,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대하는데, 나는 자주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열등감을 느끼곤 한다.

『나폴리 4부작』 속 레누처럼, 나도 누군가를 통해 나를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서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벗어날 수 없는 나를 마주한 것이다.

릴라는 내 안의 과거일 수도 있고, 레누는 그 과거를 증명받고 싶어하는 현재의 나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