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다. 말하고 싶지 않고, 설명도 하기 싫고, 그저 “내버려둬 달라”고 조용히 외치고 싶은 날.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런 날을 하루하루 쌓아, 평생을 그렇게 살아간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는 바로 그런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 소개 – 파트리크 쥐스킨트, 침묵의 거장
『좀머 씨 이야기』를 쓴 파트리크 쥐스킨트(Patrick Süskind)는 독일 출신의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가 있으며, 극도로 내밀한 감각과 인간의 본성을 다루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는 작가다.
『좀머 씨 이야기』는 1991년 출간된 단편이자 일러스트가 함께 담긴 일종의 동화 같은 소설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결코 단순하거나 가볍지 않다. 이 책은 아이의 시선으로 관찰된 한 어른의 고독을 통해, 인간의 고립, 불안, 존재의 무게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줄거리 요약 – 세상 끝까지 걷는 남자, 좀머 씨
이야기는 한 소년의 회고로 시작된다. 그가 어릴 적 살던 마을에 ‘좀머 씨’라는 사람이 있었다. 늘 무거운 배낭을 메고, 우산을 짚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말없이 걷기만 하는 사람**. 그는 누구와도 깊이 얘기하지 않았고,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조심스레 인사만 할 뿐, 그 어떤 질문도, 대화도 피하려고 했다.
소년은 점점 좀머 씨에게 관심을 갖고, 그의 걷는 경로를 따라가 보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이 수군대는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인다. 누군가는 그를 정신 이상자라 하고, 누군가는 전쟁에서 충격을 받은 사람이라 추측한다.
하지만 어느 날, 소년은 숲속 호수 언덕 위에서 좀머 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외침을 듣는다. “제발 날 좀 내버려 두시오!” 그 후 좀머 씨는 사라지고, 소년은 그가 물속으로 들어가 사라지는 모습을 목격하지만,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내 감상 – “그 사람은 내 안에도 있다”
책을 읽는 내내 이상하게도, 나는 좀머 씨가 이해되었다. 이해하려 노력한 것이 아니라, 그냥 **알겠는 마음이 들었다**. 그는 외부 세계가 자신을 침범하지 않기를 바랐고, 그 침묵 속에서 자신만의 존재 방식을 끝까지 지켜냈다. 그의 걸음은 단순한 방황이 아니라, 세상과 일정 거리를 두고 살아가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무엇보다도 내 안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걸 느꼈다. 누군가 내 안에 앉아, 조용히 외치고 있었다. “제발 날 좀 내버려 두시오.” 나는 그 사람처럼 걷지는 않지만, 그 외침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아간다.
『19호실로 가다』와의 연결 – 같은 외침, 다른 선택
이 작품은 내가 이전에 읽은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와도 강하게 닿아 있었다. 『19호실로 가다』의 수전은 **가족과 일상에 매몰된 자신을 회복하기 위해**, 호텔의 조용한 방으로 숨어든다. 그녀는 고요함 속에서 나를 찾고자 했고, 그 누구의 아내도 엄마도 아닌 ‘나’로 존재하고 싶었다.
좀머 씨는 걷는다. 수전은 앉는다. 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침묵을 실천하지만, 그 안에서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똑같다.
“나는 설명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나로 있고 싶다.”
세상은 언제나 사람에게 말을 강요한다. 이유를 말해보라고,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라고, 하지만 때로는 설명이 더 고통스러울 수 있다. 그저 “내버려 두는 것”이 가장 깊은 배려일 수 있다.
우리는 누구의 걸음으로 살아가는가
『좀머 씨 이야기』는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쓰였기에 더 슬프고, 더 순수하다. 그 눈으로 바라본 외로운 어른의 뒷모습은 그저 이상하거나 무서운 존재가 아닌, **조용히 삶을 견디는 존재**로 남는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모두, 어린 시절 어딘가에서 그런 ‘좀머 씨’를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지금 그 사람을 마음속에 숨기고 매일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말을 아낀다. 세상이 내게 묻지 않았으면 한다. 때로는 **걸음을 멈추고**, 때로는 **방 안에 앉아**, 그냥 나로서 조용히 숨 쉬고 싶다.
그리고 그 조용한 바람을 이해해줄 누군가가 아직 이 세상에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조금 덜 외로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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